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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안녕하세요. 셸먼입니다.

저는 초등학생 때 우연히 읽은 게임 매거진의 리플레이를 통해 처음 TRPG라는 놀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이것이 정확히 어떤 놀이인지도 잘 몰랐지만,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규칙과 주사위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는 모습이 묘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후 중학생 시절 우연히 D&D 룰북을 접했고, 인터넷을 통해 TRPG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취미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해 온 룰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GURPS, 패스파인더 1판, inSANe, 울타리 너머, 그리고 영원한 후일담의 네크로니카를 특히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GURPS네크로니카가 주었던, 나만의 캐릭터를 하나하나 조립해 가는 감각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수치와 특기와 장비가 단순한 목록이 아니라, "이 캐릭터는 어떤 방식으로 싸우고, 어떤 방식으로 망가지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을까"를 보여 주는 부품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RPG에서 자작 자료나 홈브류를 만드는 일도 좋아합니다. 기존 룰을 그대로 쓰는 즐거움도 분명히 있지만, 내 취향과 내 필요에 맞춰 룰과 데이터를 자유롭게 개조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TRPG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캠페인에 맞춰 직업을 고치고, 장비를 만들고, 세력을 덧붙이고, 원래 없던 장면을 위해 규칙을 새로 짜 보는 일은 제게 플레이만큼이나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혼세영요담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영원한 후일담의 네크로니카의 전투 시스템입니다. 카운트를 줄여 가며 각자가 장비한 메뉴버를 발동하고, 짧은 호흡 속에서 공방을 주고받는 그 감각을 오래 좋아했습니다. 간합과 호흡 사이로 검이 오가고, 아주 짧은 찰나에 전세가 뒤집히는 전략적 긴장감을 이 룰 안에서도 구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의 큰 계기는 울타리 너머로 진행했던 한 캠페인이었습니다. 본래 중세 유럽풍 판타지 배경의 OSR 룰을 중세 일본 분위기로 개조하여 플레이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과정과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간단한 수치로 빠르게 캐릭터를 만들고,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한계선 위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감각도 인상 깊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은 언젠가 이런 분위기를 제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요괴와 퇴마물, 검호 이야기를 오래 좋아해 왔습니다. 이누야샤, 베가본드, 무한의 주인, 야쿠시지 료코의 괴기사건부, 음양사, 교고쿠 나츠히코와 이마 이치코의 백귀야행 시리즈, 공의 경계, 신센구미 혈풍록 등 인상 깊게 본 작품도 많습니다. 제가 중세 일본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제가 좋아해 온 작품들의 향, 요괴담의 기묘함, 검극의 긴장, 난세의 어두운 낭만을 이 룰 안에 최대한 담아 보려 했습니다.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저는 토탈워 시리즈 같은 전쟁과 부대 운용의 감각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룰은 단순히 한 사람의 모험만을 다루기보다, 전열을 유지하고 분대를 이끌며 싸우는 전투를 함께 다루고 싶었습니다. 전국시대는 개인의 검, 가문의 이름, 요마의 괴담, 전장의 분대가 한곳에 모이기에 좋은 배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룰로 구현할지에 대해서도 꽤 오래 고민했습니다.

사실 네크로니카의 전투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은 중세 일본 x 요마 배경의 분대 전투 룰이라는 구상은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생성형 AI의 도움을 받아 그 구상을 실제 문서와 규칙, 데이터의 형태로 구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자료는 제 취향의 실험작입니다. 그래서 초기 공개 버전부터 제가 필요하다고 느끼거나, 언젠가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여러 보조 자료를 함께 담았습니다.

물론 RPG 룰을 만드는 데 AI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나 불만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부분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자료를 통해 상업적 이득을 얻거나, AI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결과물에 대해 과도한 창작 권리를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고안한 시스템과 제가 좋아하는 배경을 제 취향대로 엮어 만든 이 룰이, 다른 분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궁금합니다.

저에게 TRPG는 단순히 게임을 하고 끝나는 놀이가 아닙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모이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논의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함께 웃거나 고민하면서 하나의 경험을 만들어 가는 일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세션이 끝난 뒤에도 "그때 그 장면이 좋았다"고 계속 이야기하게 되는 추억까지 포함한 놀이이기도 합니다.

혼세영요담도 누군가의 탁자에서 그런 추억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부디 편하게 읽고 사용해 주세요. 많은 이용과 기탄없는 피드백을 언제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26년 4월 27일

셸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