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3. 민중 — 농민·상인·장인
세상은 사무라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민중이 세상을 먹이는 것 이다.
#세 계급
전국시대의 계급 의식은 네 층으로 나뉜다 — 훗날 에도시대에 사농공상(士農工商) 이라는 이념으로 제도화될 그 구조의 맹아(萌芽).
- 사(士) — 사무라이
- 농(農) — 농민
- 공(工) — 장인
- 상(商) — 상인
사무라이는 앞 장에 다뤘다. 이번 장은 나머지 셋. 그러나 이 순서 — 농 → 공 → 상 — 은 현실의 경제적 비중과 반대다. 실제로 부(富)는 상인 에게 가장 많이 모이고, 그 다음이 장인, 마지막이 농민. 신분은 정해져 있지만 돈은 정반대로 흘렀다.
#농민 (百姓·햐쿠쇼)
#누구인가
나라 인구의 8할이 농민이다. 일본의 진짜 주인은 어떤 의미에서 이들이다. 이들이 쌀을 만들지 않으면 사무라이도 아시가루도 밥을 못 먹는다.
#하루
농민의 하루는 해 뜨면 시작되고 해 지면 끝난다. 시계가 없다. 태양이 시계다.
- 새벽: 일어나 세안, 간단한 기도 (가미다나에 절), 아침밥 (보리밥 + 된장국)
- 낮 내내: 밭일. 봄엔 씨, 여름엔 김매기, 가을엔 추수, 겨울엔 헛간 정리·수리·짚신 만들기
- 저녁: 집에 돌아와 저녁밥, 아이들과 이야기, 일찍 잠자리
#삶의 핵심 — 마을 공동체
농민은 혼자서 살 수 없다. 마을 전체가 한 공동체다.
- 모내기 — 한 집의 논을 마을 사람 전부가 함께 한다. 순번이 돌아온다. 한 집만 모내기 못 하면 마을 전체가 손해.
- 제사 (마츠리) — 계절마다 마을 신사에 모여 제사. 우지가미에게 풍작을 빈다. 술과 춤.
- 다툼 — 물길을 두고 이웃 마을과 싸우기도 한다. "물 싸움(水争い) " 이 흔했다. 때로 사람도 죽는다.
#세금 — 연공 (年貢)
농민의 가장 큰 고통은 연공. 수확한 쌀의 50~60% 를 영주에게 바친다. 남은 것이 가족의 일 년 식량이다. 흉년이 들면 — 굶는다. 그래도 연공은 내야 한다.
연공을 못 내면 — 땅을 빼앗긴다. 땅 없는 농민은 소작농이 되거나, 길로 나간다. 길로 나간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전쟁 때
전쟁이 일어나면 — 지나가는 병사들에게 식량과 젊은 남자를 빼앗긴다. 어떤 마을은 봉기 한다. 무기는 낫과 도리깨. 여럿이 모이면 잇코잇키(一向一揆) 라 불리는 농민 봉기가 된다. 일부는 사무라이 군대를 실제로 이긴다. 하지만 — 결국 진압된다.
#영계가 열린 뒤
농민들의 밤이 바뀌었다. 부적이 집 곳곳에. 문에, 부엌에, 변소에. 우물 옆엔 소금을 뿌린다. 아이들은 저녁 후 밖에 나가지 않는다. 노파는 손녀에게 오래된 부적 묶기 를 가르친다. 할머니도 어머니에게 배웠고, 어머니도 증조모에게 배웠다 — 다만 지금처럼 매일 필요한 시대는 아니었다.
#장인 (職人·쇼쿠닌)
#누구인가
물건을 만드는 자. 목수, 대장장이, 칠기 장인, 두부 장인, 기와 장인, 기름 장인 — 수많은 갈래.
#길드
장인들은 좌(座) 라는 조직에 속한다. 일종의 길드. 특정 지역에서 특정 물건을 만들 독점권 을 갖는다. "교토의 비단 장인"은 교토 비단좌에 속해 있다. 좌에 속하지 않은 자가 비단을 짜면 — 그는 단속 된다.
그런데 — 오다 노부나가 가 이 질서를 깼다. 그의 낙시낙좌(楽市楽座) 정책은 "시장도 자유롭게, 좌도 없이" — 독점을 해체하고 누구나 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조치. 좌의 권력이 기울기 시작했다. 이 흐름은 히데요시·이에야스에게로 이어졌다. 장인의 세계는 전국 말기부터 빠르게 재편된다.
#하루
장인의 하루는 작업장(工房) 에서 보낸다. 대대로 내려온 기술. 아버지에게 배우고, 할아버지에게 배우고, 증조부에게 배웠다.
- 대장장이 — 칼을 벼린다. 하루 종일 불 앞에서 쇠를 두드린다. 여름에는 작업장이 불지옥이다. 겨울에는 괜찮다.
- 목수 — 성을 짓거나, 민가를 짓거나, 가구를 만든다. 못을 거의 안 쓴다. 짜맞춤(組接ぎ) 이 기술의 정수.
- 종이 장인 — 닥나무 껍질을 벗기고 물에 불려, 손으로 건져 올린다. 한 장을 건지는 데 숙련된 손이 필요하다.
#전쟁의 장인
장인 중 전쟁에 특화된 자 들이 있다.
- 도공 (刀工) — 칼을 만드는 자. 전국시대에 가장 귀한 장인. 명인의 칼은 한 자루에 수백 석 (연봉 규모).
- 갑주 장인 (甲冑師) — 갑옷을 만드는 자. 한 벌의 갑옷을 만드는 데 수 개월.
- 철포 장인 — 1543년 이후 새로 나타난 직종. 국산 철포를 만든다. 사카이·구니토모·히노 세 지역이 중심지.
이들은 전쟁이 있을수록 부유해진다. 그래서 이 시대엔 장인 중에 부자가 흔했다.
#영계가 열린 뒤
장인의 작업에도 의식이 들어왔다. 칼을 벼리기 전에 신단에 절을 하고, 갑옷을 완성한 뒤 음양사의 축복을 받고. 어떤 대장장이는 요마를 부리는 법을 배워, 자기 칼에 원령을 깃들게 한다. 그런 칼은 강하지만 저주 받았다.
#상인 (商人·쇼닌)
#누구인가
사고 파는 자. 포목상, 쌀장수, 소금 장수, 술장수, 장구(裝具) 장수, 약방.
#돈이 모이는 곳
전국시대에 가장 부유한 자는 사무라이가 아니라 대상인(豪商) 이다. 사카이, 하카타, 교토의 대상인들은 다이묘에게 돈을 빌려주는 위치에 있다. 빚을 갚지 못하는 다이묘는 — 대상인에게 머리를 숙인다.
#하루
상인의 하루는 길에서 시작되거나, 가게에서 시작된다.
- 행상인(行商) — 봇짐을 메고 마을에서 마을로 다닌다. 길에서 먹고, 길에서 잔다. 요마가 많은 이 시대에 여행은 위험하다. 그는 도조신에게 빌며 걷는다.
- 상점 주인 — 가게에서 손님을 맞는다. 장부를 적고, 돈을 셈하고, 납품을 관리한다. 그의 집은 가게 뒤 에 있다. 가게와 살림이 한 공간.
- 대상인 — 여러 사업체를 관리. 다이묘 가문과 거래. 배를 보내 류큐·명까지 다녀온다. 남만선이 사카이·하카타에 들어오면 설탕·유리·시계·담배·가죽·강철·서양 의약·지도 등 신기한 물건을 사들인다. 차 모임에 다이묘와 함께 앉는다.
#천하의 두 얼굴
전국시대 상인에게는 두 얼굴이 있다.
- 공식 신분은 가장 낮다. 사농공상 중 마지막. 사무라이에게 존대해야 한다.
- 실질 권력은 가장 높다. 돈이 있다. 다이묘에게 돈을 빌려주는 자는 다이묘의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
사카이(堺) 같은 자유 도시는 사실상 대상인들이 자치했다. 다이묘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카이에 야센(矢銭·군세) 2만 관을 요구하고 복속시키는 데에도 몇 년의 교섭·압박이 필요했다.
#영계가 열린 뒤
상인들에게도 요마는 사업 기회였다. 부적, 소금, 복숭아 가지, 신기를 모방한 장식품 — 이런 것들이 잘 팔렸다. 대상인들은 진짜 신기를 사들여 다이묘에게 엄청난 이익으로 되팔았다.
어떤 상인은 요마와 계약하기도 했다. 산속 오니에게 술을 바치고, 대신 숨겨진 광맥을 알아냈다. 이런 상인은 짧게 부자가 되고 길게 불운해진다. 오니는 약속을 지키기도 하지만, 결국 대가를 받는다.
#세 계급이 만날 때
사농공상은 공식 구분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섞인다.
- 한 마을의 풍작 축제에 농민·장인·상인이 다 모인다. 술을 나눈다.
- 상인이 딸을 사무라이에게 시집보내는 일도 있다. 돈이 있으면 — 가능하다.
- 장인이 대량 주문을 받아 큰돈을 벌면 상인처럼 사업을 확장한다.
이 경계의 유동성이 전국시대의 또 다른 숨은 특징이다. 혈통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 시대.
#한 풍경으로 마침
어느 도시의 저녁. 시장이 파장한다.
- 농민 하나가 장에서 쌀을 다 팔지 못해 남은 쌀을 메고 돌아간다. 내일 다시 와야 한다.
- 장인 하나가 새로 만든 칼을 장인 동료에게 보여준다. "이번엔 잘 빠졌어." 동료가 끄덕인다.
- 상인 하나가 가게 문을 닫으며 장부를 접는다. 오늘의 수익이 나쁘지 않다. 내일은 다이묘가에 납품이 있다.
세 사람은 같은 거리에 산다. 같은 나라에 산다. 같은 시대에 산다. 그러나 그들의 하루는 다르다. 그 다름이 전국시대의 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