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v1.3.3 · zn-doc

#반 보

zn10 권말 소설 · 진지도 ★★★ · 순수 향(픽션). 규칙·수치는 나오지 않는다.

반 보 시작 삽화

마당에 깐 흰 모래가 햇빛을 되쏘아 눈이 시렸다.

소겐은 그것이 좋았다. 눈이 시리면, 다른 것을 보지 않게 된다.

툇마루에는 주군이 앉아 있었다. 그 한 단 아래, 부채를 쥔 손들이 늘어섰다. 누구의 얼굴도 보지 않았다. 마주 선 남자만 보았다. 그것이 검객의 예의였다.

상대의 이름은 들었으나 잊었다. 잊으려고 잊었다.


반 보 중간 삽화

서로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시작했다.

둘 다 멈춰 섰다. 멀찍이, 서로를 재며. 바람이 모래 위를 한 번 쓸고 지나갔다.

소겐은 호흡을 내려놓았다. 스승은 말했다. 겨눔이란 칼끝의 일이 아니다. 숨의 일이다. 상대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려 있었다. 숨이 위에 떠 있다는 뜻이었다. 긴장이 가슴께에 고였다는 뜻이었다.

이미 거기서 한 자락 기울었다.

한 발.

소겐이 먼저 들어갔다. 반 보. 모래가 발밑에서 짧게 비명을 질렀다.

상대도 따라 좁혔다. 이제 한 발만 더 디디면 칼이 닿는 자리. 결정의 거리였다. 여기서부터는 누구도 그냥 서 있을 수 없다.

상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잠깐. 칼끝이 떨린 것이 아니라 — 마음이 먼저 떨린 것이다. 소겐은 그것을 보았다. 보도록 평생을 갈았다.

무너진다.


상대가 먼저 베었다. 두려운 자는 늘 먼저 벤다.

칼날이 소겐의 머리띠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올, 끊겼다. 닿았으나 끊지 못한 칼. 그 칼이 헛돈 그 짧은 틈에, 상대의 평정은 물 빠진 모래처럼 주저앉았다.

소겐은 들어갔다.

반 보. 한 호흡 먼저.

상대의 칼이 돌아오기 전에, 그의 칼이 먼저 도착했다. 빈자리로. 무너진 마음이 비워 둔, 바로 그 한 칸으로.

소리는 크지 않았다.


상대는 모래 위에 무릎을 꿇었다. 손목이 꺾여 칼이 떨어졌다. 베인 어깨에서 흰 모래로 붉은 것이 번졌다.

끝났다. 소겐은 알았다.

그런데 칼을 거두지 않았다.

피가 머릿속에서 북처럼 울렸다. 마당의 흰빛이 더 희게 타올랐다. 평생을 이 한순간을 위해 갈았는데, 그 한순간이 너무 짧게 끝나 버린 것이 — 억울했다. 분했다. 더, 라고 몸이 말했다.

소겐은 무릎 꿇은 남자의 얼굴을 베었다.

깨끗하게 이긴 승부를, 한 칼 더로 더럽혔다. 쓰러진 자를, 굳이.

비명이 마당을 갈랐다.


반 보 마무리 삽화

부채 접히는 소리가 났다.

탁, 하고. 마른 소리였다. 소겐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툇마루의 주군은 웃고 있지 않았다. 부채를 무릎에 내려놓은 채, 무너진 남자를 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한 가신이 새파랗게 질려 일어서고 있었다. 쓰러진 자의 형이라 했던가. 주군이 아끼는.

"흥이 깨졌다." 주군이 말했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마당이 조용해졌다. 모래가 다시 한 번 바람에 쓸렸다.

소겐은 칼을 든 채 서 있었다. 이겼다. 분명히 이겼다. 마주 선 자를 무너뜨렸고, 반 보를 먼저 가져갔고, 한 호흡 먼저 닿았다. 검객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런데 흰 모래 위에서, 그가 이긴 그 자리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재로 식어 갔다.

스승은 이기는 법을 평생 가르쳤다.

이긴 뒤에 칼을 거두는 법은, 끝내 가르쳐 주지 않았다.

소겐은 눈이 시렸다. 흰빛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