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v1.5 · zn-doc

#천붕철권

천붕철권 시작 삽화

#향 — 천붕철권

zn13 권말 소설 · 진지도 ★★ · 순수 향(픽션). 규칙·수치는 나오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신을 세우는 건, 우리가 졌다는 뜻이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 거인의 가슴팍으로 기어든다. 사람이 사람의 무기로 사람을 더는 못 이긴다는 것을 인정한 날에만, 사람은 신을 부른다. 칼로 안 되고, 활로 안 되고, 철포로도 안 되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강철 속에 신을 눕히고, 그 위에 우리 둘의 목숨을 얹는다.

태갑은 갑주가 아니다. 관(棺)이다. 신을 눕히는 관. 나는 그 안으로 갑옷을 입듯 들어가는 게 아니라, 죽은 자가 관에 눕듯 등을 대고 누워 들어간다. 가슴 한복판, 가장 깊은 자리 — 심장에 가장 가까운, 가장 무력한 자리. 거기가 내 자리다. 무녀의 자리. 신을 달래는 손을 가진 자의 자리.

진고는 위쪽, 팔다리를 쥐는 자리로 들어간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한 적이 없다. 낭인 출신의 그 사내는 무녀를 천하게 보고, 나는 칼밖에 모르는 그를 무지하다 여긴다. 그런데 관 속에서 우리의 손이 가까워지면, 미워할 틈이 없다.

「달랠 준비는.」 그가 위에서 묻는다. 묻는 게 아니라, 거의 명령이다.

「당신이 늦지만 않으면.」 나는 받아친다. 그러고는 둘 다 입을 다문다. 더 말하면, 신이 깬다.

신은 차가운 강철 속에서 깨어난다. 가장 먼저 안쪽 — 내 등이 닿은 자리부터 데워진다. 한 줌의 온기가, 곧 화로가 되고, 화로가 곧 불바다가 된다. 신은 인간의 몸을 데우고, 인간은 그 열에 타 죽지 않으려 한 모금씩 자신을 식힌다. 나는 첫 점화에서 그것을 처음으로 살에 새긴다. 신은 뜨겁고, 나는 식어가야 한다. 내가 식기를 멈추는 순간, 거인도 멈춘다.

심장 박동 하나. 둘.

그리고 거인이 일어선다.

지축이 운다. 무릎을 펴는 데에만 한 박자, 허리를 세우는 데에 또 한 박자. 우리는 굼뜨다 — 그러나 굼뜬 채로, 하늘을 가린다. 발밑의 졸병들이 우리의 그림자에 잡아먹히고, 비로소 고개를 든다. 그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사무라이도, 시노비도, 철포 사수도 — 모두 한순간 칼을 잊는다.

나는 그 얼굴들을 본다. 우리가 졌다고 인정한 자리에서, 우리가 부른 신이 일어선다.


진군은, 한 걸음과 한 걸음 사이에 시간이 있다.

그 사이를, 적이 채울 수 있다. 채울 수 있는데도, 결국 그 한 걸음이 모든 것을 부순다.

적의 한 부대가 우리를 향해 화살을 메긴다. 나는 그가 활을 당기는 것을 본다. 시위가 뺨에 닿는 것을,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그 떨림에 깃든 두려움까지 — 다 본다. 진고가 강철의 팔을 들어 올리는 사이, 화살은 이미 날아온다. 우리는 늦었다.

늦은 채로, 그를 부쉈다.

강철 주먹이, 화살이 박힌 자리로 한 박자 뒤에 내려앉는다. 다듬을 수 없이 거대한, 단 한 번의 짓밟음. 정교함은 없다. 베어 가르는 묘기도 없다. 그저 무게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한 줌의 보병이 우리에게 닿지조차 못한다 — 그들의 창끝은 강철 정강이에서 부러지고, 그들의 칼은 흠집 하나 남기지 못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적이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적은 우리가 늦다는 걸 안다. 우리의 한 걸음이 떨어지기까지 셋을 셀 수 있다는 걸 안다. 알면서도, 그 한 박자를 메우지 못한다. 도망쳐도 늦고, 막아도 늦는다. 늦는 것이 우리이지만, 늦는다는 사실 앞에서 떠는 것은 그들이다. 다 보이는 죽음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나는 위쪽으로 손을 뻗어, 진고의 거동에 동력을 흘려보낸다. 신을 달래고, 다음 걸음을 위해 또 한 모금 나를 식힌다. 한 부대가 사라지고, 또 한 부대가 무너진다. 우리는 산이 걷는 속도로, 그러나 산이 무너지는 무게로 나아간다.

「늦었어.」 진고가 이를 악물고 말한다.

「그래도 부쉈잖아.」 나는 대답한다.

이것이 우리가 신을 빌린 방식이다. 빠르지 않다. 영리하지도 않다. 다만, 멈추지 않는다.


천붕철권 중간 삽화

그때, 안개 너머에서 그것이 일어선다.

거인과, 거인 같은 것.

안개를 갑옷처럼 두른 거대한 요마. 이름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그것은 우리만큼 크고, 우리만큼 느리고, 우리만큼 무겁다. 그것이 한 걸음을 떼자, 우리가 짓밟아 온 들판이 통째로 기운다. 처음으로, 우리의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에 잡아먹힌다.

이건 공짜 승리가 아니다. 진짜 충돌이다.

그것이 팔을 치켜든다. 안개가 칼날처럼 뭉친다. 나는 그것이 내리치는 궤적을 — 다 본다. 다 보고도, 우리는 늦는다. 진고의 강철 팔이 마주 올라가는 동안, 안개의 칼은 이미 우리의 어깨를 찢는다. 거인의 비명 같은 금속음. 한 합에 산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들판 가장자리에서, 또 다른 위협이 울린다. 철포대다.

그들은 우리의 갑옷을 노리지 않는다. 가슴 한복판, 가장 깊은 자리 — 심장을 노린다. 그들은 안다. 거인의 심장을 멈추면 거인이 멈춘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들보다 더 잘 안다.

심장은 곧 나다.

그들이 심장을 노린다는 것은, 곧 나를 노린다는 것이다. 강철은 그들의 탄을 견딜지 몰라도, 그 갑옷을 꿰뚫는 탄은 강철을 문다. 한 발이 가슴팍을 때릴 때마다, 나는 내 등 뒤에서 신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신이 흔들리면, 거인이 비틀거린다. 거인이 비틀거리면, 진고의 다음 한 걸음이 더 늦어진다.

「스즈!」 진고가 외친다. 처음으로,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버틸 수 있나!」

신은 뜨겁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이 식어, 손끝이 차갑다. 하지만 아직 한 모금이 남았다.

「한 번이면 돼.」 내가 말한다. 「한 번만, 늦지 마.」

요마가 다시 팔을 든다. 가장 긴 윈드업. 가장 큰 한 방. 그것이 우리를 끝내려 든다. 안개가 하늘을 가린다.

우리에게도 한 박자가 필요하다. 단 한 번뿐인 주먹은, 그냥 휘둘러서 나오지 않는다. 한 호흡을 통째로 비워, 식혀 온 모든 열을 가슴 한복판에 모아 두어야 한다. 나는 남은 모든 것을, 마지막 한 모금까지 신에게 바친다. 거인의 가슴 한복판에서, 화로가 불바다가 되고, 불바다가 별이 된다. 한 박자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다만 차오른다. 진고의 손과 나의 손이 — 마침내 한 몸이 된다. 미워할 틈도, 망설일 틈도 없이.

그리고 나는, 남은 숨을 모조리 끌어올려 그 한 방에 이름을 붙인다. 형(形)에 이름이 없으면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버릇이다. 이름을 부르면 그 한 수가 나타나 준다 — 신의 이름에 값하는, 하늘이 무너지는 이름이라면.

「── 천붕철권(天崩鐵拳)!」

진고도 목청껏 함께 외친다. 두 목숨이 한 이름을 부르는 순간, 거인의 주먹에 하늘 전체가 실린다.

요마의 칼이 내려오는 것을 다 보면서, 그 아래로 — 한 박자 늦게 — 강철 주먹이 들어간다. 다 보고도 늦었고, 늦은 채로, 부쉈다. 한 번 휘두르면 다시는 휘두를 수 없는 주먹이, 안개의 가슴팍을 위로 꿰뚫는다. 모아 둔 모든 열이 그 한 점에 쏟아져 — 텅 빈다. 시야가 온통 흰빛으로 찬다.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 나지 않는다.

안개가 흩어진다. 거인 같던 것이, 거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천천히, 무너진다.


천붕철권 마무리 삽화

거인이 식어간다.

별이 되었던 가슴이, 불바다로, 화로로, 한 줌의 온기로 가라앉는다. 강철이 다시 차가워진다. 나는 등을 댄 채로, 마지막까지 신을 달랜다. 잘 싸웠다고, 이제 누우라고. 신은 순순히 눕는다 — 들어올 때처럼, 관 속에.

가슴팍이 열리고, 우리는 거인에게서 내려온다. 진고가 먼저 내려,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잡는다. 손끝이 아직 차갑다. 매 호흡, 한 모금씩 나를 바쳐 신을 식혀 온 대가다. 비극은 아니다. 치른 값이다. 신은 뜨겁고, 나는 한 모금씩 식어간다 — 그것을 알고도 나는 이 자리에 누웠으니까.

「무녀.」 진고가 말한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머뭇거린다. 「── 늦지 않았어. 끝에는.」

나는 웃는다. 그가 늦지 않은 게 아니다. 우리가 늘 늦었고, 늦은 채로 이겼을 뿐이다. 하지만 그 말을 바로잡지는 않는다.

「당신이 한 박자만 더 빨랐으면, 신을 부를 일도 없었을 텐데.」

「다음엔.」 그가 말한다. 그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여전히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한 신을 한 번 세웠다. 그것이면, 오늘은 됐다.

빌린 힘은 갚아야 한다. 신을 강철에 가두면, 강철이 신을 닮아간다 — 무겁고, 느리고, 멈출 수 없게. 그리고 신을 빌린 자는, 신의 뜻을 함께 빌린다. 나는 그 값을 매 호흡 치렀고, 앞으로도 치를 것이다.

식어버린 거인을 등 뒤에 두고, 우리는 걷는다.

이번 한 걸음은, 강철의 다리가 아니라 내 다리로 간다. 차갑지만, 내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