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v1.3.3 · zn-doc

#아무 일도 없던 밤

zn02 권말 소설 · 진지도 ★★ · 순수 향(픽션). 규칙·수치는 나오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던 밤 시작 삽화

해가 삼나무 끝에 걸리면 사당은 늘 한 톤 어두워진다.

나는 그게 좋다. 낮 동안 신사는 그저 낡은 나무집이지만, 저물녘이 되면 비로소 제 얼굴을 드러낸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새소리가 끊기고, 공기가 한 겹 식는다. 그러면 나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으로 나간다.

"또 청소냐, 스즈."

장작을 패던 겐 아저씨가 웃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부른다. 청소.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낙엽을 쓸고, 돌계단을 닦고, 시메나와—금줄의 흐트러진 매듭을 다시 묶는다. 그리고 사당 네 귀퉁이에 소금을 한 줌씩 뿌린다.

하지만 할머니는 말했었다. 이건 청소가 아니라고. 매일 저녁 이 둘레를 한 바퀴 도는 건, 풀려 가는 끈을 다시 매는 일이라고. 사람 눈에 안 보이는 끈을.

나는 매듭을 고쳐 묶으며 작게 노래한다. 가락도 없는, 그냥 숨 같은 소리. 방울을 한 번 흔들면 맑은 소리가 어스름에 동그랗게 번진다. 그게 신호다. 오늘 밤도 문은 닫혀 있어요. 그렇게 카미께 아뢰는.

겐 아저씨는 모른다. 마을 누구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모르는 채로 무사한 밤이, 내가 바라는 전부니까.


아무 일도 없던 밤 중간 삽화

그 사람은 어둑해질 무렵 마을 어귀에 나타났다.

삿갓을 깊이 눌러쓴 나그네였다. 지친 걸음, 흙 묻은 짚신. 흔한 떠돌이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인사를 건넸고, 누군가는 물을 떠다 주었다.

그런데 나는—멀리 우물가에서 물동이를 이고 있던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 사람의 그림자가 길었다. 너무 길었다. 해 떨어지는 쪽도 아닌데, 발밑에서 무언가가 묽은 먹물처럼 마을 안쪽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나만 보였다. 나만 보이는 게 당연했다.

죽음을 본 사람이야.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것도 씻지 않고 왔어.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부정은 큰 소리로 오지 않는단다, 스즈.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전장을 지나왔거나, 길에서 누군가를 묻어 주었거나—슬픈 일을 겪은 사람일수록 그걸 모르고 묻혀 온단다. 미워하면 안 돼. 다만, 들이지만 마라.

나는 물동이를 내려놓고 뛰었다. 사당 쪽이 아니라, 마을 안쪽 길로.


저녁상 냄새가 골목마다 피어올랐다. 아이들이 마지막 술래잡기를 하고, 노인들이 평상에 앉아 있었다. 평화로운, 아무것도 모르는 저녁.

나는 그 사람보다 먼저 우물가에 가 닿았다. 숨이 턱에 찼다.

"손님." 최대한 차분하게. "먼 길 오셨지요. 발 씻고 가시라고, 신사에서 물을 데워 두었어요."

삿갓 밑에서 지친 눈이 나를 보았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그저 많이 걸어온 눈.

"…나는 신사에 볼일이 없네, 아이야."

"볼일은 신사가 손님께 있어요." 나는 웃어 보였다. 떨리지 않게. "이 마을은요, 들어오기 전에 발을 씻는 게 예법이거든요. 별것 아니에요. 정말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우리 마을엔 그런 예법이 없지만, 오늘 밤만은 있는 거다. 내가 방금 만든 거다.

나는 그를 마을 안쪽이 아니라, 옆으로—삼나무 숲의 작은 물가로 돌려세웠다. 거기엔 데워 둔 물도, 마른 천도, 소금 단지도 미리 놓여 있었다. 해질 무렵마다 채워 두는 것들. 오늘 같은 손님을 위해, 할머니 때부터.

그가 천천히 삿갓을 벗었다. 발을 씻는 동안, 나는 그의 등 뒤에서 조용히 노래했다. 가락도 없는, 숨 같은 소리. 방울은 흔들지 않았다. 흔들면 그가 알아챌 테니까. 그저 입속으로만.

발밑에 흐르던 묽은 먹물이, 데운 물에 천천히 풀려 흩어졌다. 길이 짧아졌다. 그림자가, 그냥 사람의 그림자가 되었다.

"…이상하구나." 그가 중얼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가볍다. 오래 무겁던 것이."

"잘 씻으셨으니까요." 나는 마른 천을 건넸다.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 저녁상 차려 둔 집이 있어요."


아무 일도 없던 밤 마무리 삽화

그는 그날 밤 마을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떠났다. 잘 잤다며, 오랜만에 꿈을 안 꿨다며 웃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겐 아저씨는 내가 또 청소하느라 저녁을 늦게 먹었다고 핀잔을 줬다. 마을 사람들은 어젯밤 손님이 좋은 사람이었다고만 기억할 거다. 사당의 금줄은 오늘도 멀쩡하고, 숲에서는 아무것도 걸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빗자루를 든다. 소금을 한 줌 쥔다. 방울을 한 번 흔든다. 맑은 소리가 어스름에 동그랗게 번진다.

할머니는 말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무언가를 베는 게 아니라고. 베야 할 때가 오면, 그건 이미 우리가 한 발 늦은 거라고.

그러니까 오늘 밤도, 아무 일도 없었다.

그게—내가 이긴 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