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v1.3.3 · zn-doc

#부채 한 자루

zn04 권말 소설 · 진지도 ★☆ · 순수 향(픽션). 규칙·수치는 나오지 않는다.

부채 한 자루 시작 삽화

문지기는 키가 컸고, 눈치가 빨랐다. 둘 다 나한테는 나쁜 소식이었다.

"무기는 여기 두십시오."

나는 허리에서 칼을 풀어 그의 손에 얹었다. 칼집까지 공손하게. 다음으로 품속의 작은 칼, 그다음 소매 안쪽의 가는 침통까지. 하나씩, 미련 없이. 미련 없는 척이 핵심이다. 아까워하면 의심받고, 너무 술술 내놓아도 의심받는다. 적당히 서운한 얼굴로.

"이게 전부입니까?"

"여인의 몸으로 무얼 더 차고 다니겠습니까."

나는 손에 든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옻칠 위에 매화를 그린, 어디서나 파는 흔한 부채다. 그가 그것을 흘긋 보았다. 나는 숨을 멈추지 않았다. 숨을 멈추는 게 제일 들킨다.

"부채는… 더우실 테니, 가지고 드시지요."

통과.

쇠살이다, 이 부채. 살 한 대 한 대가 쇠다. 무겁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우아하게, 손목 힘을 빼고 부친다. 가벼운 척하는 데 손목만 한 게 없다.


부채 한 자루 중간 삽화

다회는 좁은 방에서 열렸다. 다다미 넉 장 반. 화로에서 물이 끓고, 주인이 찻솔을 젓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맞은편 — 오늘의 표적, 호리 단조. 영지의 곳간 장부를 베껴 두는 게 내 일이고, 그 장부 열쇠가 저 사내 허리춤에 있다.

문제는 이 방에 나 말고도 손님이 셋이라는 것.

"어디서 오셨다 했지요?"

호리가 물었다. 눈이 웃지 않는 웃음이었다. 나는 부채를 펴서 입가를 가렸다. 거짓말은 입을 가리고 하는 게 좋다. 표정의 절반을 숨길 수 있으니까.

"교토에서요. 우메가에 가문의 먼 친척 되는 여식입니다."

"우메가에라. 그 댁 따님이면 차를 좀 아시겠군."

함정이다. 나는 차를 모른다. 정확히는, 우메가에 가문 따님이 알아야 할 만큼은 모른다.

찻잔이 내 앞으로 왔다. 모두가 보고 있었다. 나는 잔을 받아 들고 — 부채를 탁, 접었다.

"어머, 손이 차갑네요. 잠시만."

그리고 빈손으로 화로 쪽에 손을 쬐는 척하며, 곁눈으로 주인이 잔을 어떻게 돌리는지, 다른 손님이 어디에 입을 대는지 다 보았다. 세 박자. 돌리고, 마시고, 닦는다. 부채로 시간을 벌면 눈이 일을 한다.

"이제 좀 낫네요."

나는 본 대로 했다. 정확히, 우아하게. 호리의 눈이 아주 살짝 풀렸다.


문제는 차를 다 마신 뒤에 왔다.

"실례지만," 호리가 몸을 기울였다. "그 부채, 무거워 보이는군요."

방 안의 공기가 멎었다. 나는 웃었다. 진심으로 웃는 것처럼 보이게.

"무겁다니요. 여인의 부채인데요."

"한번 봅시다."

내미는 손. 거절하면 끝장이고, 건네줘도 끝장이다. 쇠살의 무게는 손에 닿는 순간 들킨다.

나는 부채를 그에게 — 건네지 않았다. 대신 활짝 펴서, 그의 얼굴 앞에서 천천히 부쳤다. 매화 그림이 그의 코앞에서 흔들렸다.

"이렇게요. 더우시죠?"

향이 확 퍼졌다. 아까 화로 옆에서 소매에 슬쩍 묻혀 둔, 짙은 침향. 호리가 눈을 깜빡였다. 한 박자. 내가 노린 건 그 한 박자였다.

"향이 참 좋지요? 우메가에 가문 비전입니다. 만져 보시면 향이 손에 배어, 사흘은 안 빠집니다. 그래도 잡아 보시겠어요?"

호리의 손이 멈칫했다. 옆에서 주인이 거들었다. "허허, 단조 공. 여인의 부채를 함부로 잡으면 소문이 고약합니다."

웃음이 터졌다. 공기가 풀렸다. 호리도 멋쩍게 손을 거뒀다.

"…과연. 실례했소이다."

나는 부채를 접어 무릎에 단정히 놓았다. 쇠살의 무게가 무릎을 눌렀지만, 내 표정은 매화처럼 가벼웠다.


부채 한 자루 마무리 삽화

장부 열쇠는 그날 밤 호리가 술에 곯아떨어진 사이에 가져왔다. 그건 또 다른 이야기고,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다회 자리를 나오며 문지기에게 칼이며 침통이며 다 돌려받았다. 묵직한 무장들이 다시 몸에 붙으니 오히려 어색했다. 정작 오늘 나를 살린 건, 그가 의심조차 안 한 부채 한 자루였는데.

"좋은 자리였습니까?" 문지기가 물었다.

"덕분에요." 나는 부채를 살랑 흔들었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골목을 돌아 사람 없는 데까지 와서, 나는 그제야 부채를 진짜로 들어 보았다. 묵직했다. 쇠살이 손바닥에 든든했다.

무기를 풀어야 들어가는 자리. 그런 자리에 가장 떳떳하게 걸어 들어가는 무장이 바로 너지, 하고 나는 부채에게 속으로 인사했다. 칼은 문 앞에서 멎지만, 너는 끝까지 함께 들어간다.

매화 그림이 달빛에 한 번 반짝였다.

(끝)